나를 살아있게 한 것은 오직 ‘믿음’입니다 / 이영순 권사

나를 살아있게 한 것은 오직 ‘믿음’입니다 / 이영순 권사
2017-07-02 13:02:21
관리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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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를 살아있게 한 것은 오직 ‘믿음’입니다

이 영 순 권사(1교구 21구역)

 

 

광야 같은 삶을 지나

저는 충남 서천군 비인면에서 9남매 중 6째로 태어났습니 다. 어렸을 때 신앙심 깊은 친구 엄마 따라 교회를 다녔는 데 예수 믿는 게 뭔지 몰랐어도 빨간 십자가가 참 좋았습니 다. 부모님은 거지가 오면 마루에 앉혀 밥상까지 차려 줄 정 도로 성품이 착하셨습니다. 아마도 제가 이런 부모님을 닮 지 않았나 싶습니다. 제가 18살 무렵, 아버지는 사업이 망하 고 고혈압을 앓다가 돌아가셨고 언제부턴지 미신을 믿고 비 는 것이 일상적이었던 어머니가 귀신 들린 행동을 했습니 다. 어쩔 수 없어 오빠들이 어머니를 방에 가두고 감금 생활 을 한 것이 6개월쯤 되던 때, 어머니는 한 번만 문을 열어달 라고 사정했습니다. 문을 열자마자 한 걸음에 뛰쳐나간 어 머니를 찾을 수 없었는데 해질녘에서야 교회에서 엎드려 빌 고 있었던 어머니를 찾았습니다. 목사님으로부터 기도와 안 수를 받고선 오랫동안 어머니 속에 자리 잡고 있던 귀신이 나갔고, 그 후 어머니는 평생 새벽기도회에 다니셨고 교회 에 헌신하며 사시다가 소천 하셨습니다. 방앗간을 운영하는 저희 집에 놀러온 오빠 친구에게 큰 사 고가 나서 보상해주는 일로 저희 집은 하루아침에 풍지박살 이 났습니다. 그 후 저는 전라도 군산에 가서 둘째오빠가 운 영하는 제과점 일을 도왔고 맞은편 회사를 다니고 있던 남 편(박맹제 권사)을 만났습니다. 둘째오빠가 군대를 가면서 저 는 올케랑 서울로 거처를 옮겼고 남편은 양양의 한 철강업 체에 직장을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 날 원주기독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라는 소식이 왔습니다. 그 때 제 나이 19살, 남편은 25살! 성탄절 새벽녘, 남편의 상 황이 너무 궁금하여 기차를 타고 원주기독병원엘 왔습니다. 그런데 건강하고 씩씩했던 남편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그의 옆엔 휠체어가 있었습니다. 전기기술자로 일했던 철강 업체에서 야밤에 정전이 나서 전신주에 올라가 스위치를 작 동하고 내려오다가 달려오는 차량이 그 전주를 들이받았고, 남편은 15m높이에서 떨어져 ‘하반신 마비’라는 비극이 일어 난 것입니다. 남편은 아버지가 한국전쟁 시 북한군의 지리산토벌작전으 로 사살 당했고, 어머니의 재혼으로 6살짜리 아이(남편)를 외 가에 놓고 갔다고 합니다. 그 후 작은 아버지 댁에서 자랐지 만 머슴처럼 살았고 갈 곳도 없던 처지였습니다. 남편을 만 나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남편의 딱한 사정이 자꾸만 생각나 서 밥맛도 없고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. 입원 중이었던 남편 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자살을 생각했지만 류병렬 장로 님 등 여러분들의 사랑과 관심을 입고 힘을 얻었고 퇴원 후 엔 강원도 간성, 시집간 누나집으로 갔습니다. 산재처리건 으로 서울의 변호사 사무실에 오가던 남편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저는 겁도 없이 남편에게 “함께 살아주겠다”고 했습니다. 남편은 “건강한 여자가 장애인 남자와 살면 건강 한 여자도 장애인이 되는 거”라며 호되게 소리치며 거절했 습니다. 그러나 내 의지를 꺾지 못한 남편은 “그럼 네가 날 사랑하는 날까지만 살자!”고 했습니다. 저는 어렸지만 신중 했습니다. 어떻게 이 사람과 살 것인가? 내가 이 사람을 버 리고 행복해진다면 그 때 이 사람이 생각나면 어쩌지? 돈이 없으면 어때? 나 하나 희생해서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야 지! ... 간성의 시골교회에서 친정엄마도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을 올리고 신접살림을 시작했습니다. 신혼 초 사고보상금으로 건어물도매상을 하다 쫄딱 망했을 때는 바람 앞에 등불 같 아 인생이 너무 슬펐습니다. 그 후 군산으로 내려가 남편이 아이들 과외로 생활을 이어갔으나 하루 종일 앉아있어 생긴 욕창으로 엉덩이가 썩어 들어갔습니다.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이 “왜 저 사람과 살아?”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준다고까 지 했습니다. 나는 뭐하나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었으나 늘 하나님은 내 가슴 속에 살아계심을 경험합니다. 내 위로자 는 주님밖에 없다 믿었고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었기 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. 지금껏 제가 힘겨운 삶을 살아오고 견뎌온 가장 큰 힘은 ‘믿 음’입니다. 어차피 남편이야 제가 선택한 것이고 믿는다는 것은 ‘사랑’인데 장애인 남편을 버리는 것은 죄짓는 것이요 행함 없는 신앙인으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. 하나님이 제 게 “그가 불쌍한 사람이니 잘 보살펴주라”고 남편과의 만남 을 허락해주셨다고 믿었기에 모든 상황을 아멘!으로 받아 들여 늘 기도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려고 노력했습니다. 예수 님의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를 생각하면 나보다 더 큰 고난 당한 주님 앞에서 나의 십자가는 보잘 것 없이 작았습니다.

 

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

1976년 원주로 이사와 기독병원에서 무료로 욕창수술을 받고 남편이 기독병원 내 재활원(지금의 원주시 장애인복지관)에 서 강사로 일할 때 류병렬 장로님 전도로 평원동 시절의 영 강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. 80년도에 부임하신 서재 일 목사님 은 장애인 들에 대해 사랑과 관 심이 많으 셨고 남편 을 기점으 로 여러 장 애인분들 이 영강교 회를 나왔 습니다. 남 편이 젊어 서 욕창으 로 심한 고 생을 하던 때의 일입 니다. ‘내 일 죽더라도 기도나 하고 죽자!’ 결심하고 철야와 새벽기도 회에 나와 담임목사님의 기도와 안수를 받으며 욕창이 낫는 체험을 했습니다. 그 믿음으로 최근 욕창으로 몸이 썩어 죽 을 고비 중에도 주님을 애타게 부르며 기도하던 남편이 자 랑스럽고 안쓰러웠습니다. 하나님은 부족한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독병원에 취업하 여 23년을 근무하게 하시고 연약한 남편을 섬기며 순종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. 가난한 형편에도 잘 키우려 애썼던 사랑하는 아들 영수에게 부모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효심을 주시고, 아들을 향한 모든 욕심 다 내려놓고 다만 자 식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로 서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. 부 족한 제게 올해 처음 있는 영강창립기념 ‘영강인’상을 주셨 습니다. 남편을 위해 지금껏 도우신 에벤에셀 하나님과 불 쌍한 양같이 여겨 늘 가슴에 품고 기도해주신 담임 목사님 과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. 저의 간절한 소망은 “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 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 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”(시43:5)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그 어떤 환난이 와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남편과 저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.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다만 감사함으 로 기도하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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